본문 바로가기
생활 정보 TIP/역사,인물, 영웅

한평생 독립운동에 헌신한 오산 이강 선생 유품 <설니홍조> 첫 공개

by 정부정책과 지원사업등을 우빗거리다(Ubit) 2023. 4. 5.
반응형

한평생 독립운동에 헌신한 오산 이강 선생 유품 <설니홍조> 첫 공개

2023.04.05 국가보훈처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의장 등을 지내며 한평생을 독립운동에 몸바친 오산 이강(吾山 李剛, 1962년 독립장)선생이 생전에 쓴 글과 중국인 제자 등이 보낸 헌사를 엮은 공책이 일반에 처음 공개된다.

 

국가보훈처(처장 박민식)는 “대한민국임시정부수립기념일(4월 11일)을 맞아 국립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이 미주, 연해주, 중국 등지에서 활동하며, 임시의정원 의장, 광복군 모병 활동 등을 펼친 오산 이강 선생의 유품 <설니홍조(雪泥鴻爪)>*를 5일 공개한다”고 밝혔다.

* 雪泥鴻爪 : ‘눈 녹은 진흙 위의 기러기 발자국’이란 뜻으로 중국 송나라의 소식(소동파)의 시에 등장하는 표현임. 시간이 지나면 흔적이 없어지는 인생의 자취란 의미로 해석됨

 

평안북도 용강 출신의 이강 선생(1878~1964)은 미국 샌프란시스코, 러시아 연해주, 만주와 중국 등지를 다니며 <공립신보> 주필, <대동공보> 편집책임을 맡는 등 항일 언론 활동을 전개했으며, 안중근 의사의 하얼빈 의거 계획과 실행을 돕기도 했다. 1919년 강우규 의사의 폭탄 투척 사건에 연루되어 옥고를 치른 후 중국 상하이로 건너가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의원과 부의장을 거쳐 1927년 의장직을 맡았다.

 

 

이후 흥사단 원동지부원으로 참여한 후 남중국 방면을 여행하던 중 1928년, 중국인 교회에서 강연하다 체포되어 다시 옥고를 치렀으며, 1930년 만기 출옥 후 고향 용강을 거쳐 중국 푸젠성 취안저우에 정착하며 중국인 제자들을 양성하고, 1941년 한국광복군 수립 후 광복군 모병활동을 하다 광복을 맞이했다.

 

이번에 공개된 <설니홍조(雪泥鴻爪)>이강 선생의 중국인 제자와 지인들이 보낸 헌사를 적은 두 권의 공책(노트)이다. 이강 선생은 1944년 푸젠성 취안저우를 떠나며 1권에 쓴 서언을 통해 중국에서의 독립운동 활동을 돌아보면서 자신에게 호의를 베푼 제자와 지인들에게 감사를 전하고 그들과의 기억을 평생 잊지 않으려는 생각에서 기념책을 만들었다고 적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설니홍조>는 중국인 제자들의 이강 선생에 대한 독립운동에 대한 평가와 함께 지인들과의 이별의 아픔을 담은 책이라 할 수 있다.

 

1권은 1947년 타이완에서 국내로 귀국하기 전까지 중국 체류 시기에 작성된 것으로 보이며, 선생을 포함한 73명의 제자들이 쓴 글귀로 구성되어 있다. 여기에 쓰여진 중국인 제자들의 글은 머나먼 타지에서의 만남과 이별에 대한 아쉬움, 그리고 독립을 위해 활약했던 이강 선생에 대한 존경심을 엿볼 수 있다.

 

 

실제로 이강 선생의 중국인 제자 리이(李毅)는 “굳은 의지와 고된 투쟁 속에 인생은 얼마나 위대한가. 오산 선생님, 당신을 깊이 존경합니다”라고 썼다.

 

2권은 이강 선생이 백범 김구 선생과 성재 이시영 선생 등 6인에게 귀감이 되는 글귀를 요청하여 쓰여진 것으로, 김구 선생은 중국 송대 문장가 범준(範浚)의 문집에 실린 글을 옮겨 적었고, 이시영 선생은 “군자는 덕으로써 사람을 사랑하며 스스로를 기만하거나 남을 속이지 않는다”라고 썼다. 2권 마지막 부분에는 이강 선생이 쓴 국한문과 영문 이력서도 실려 있다.

 

김희곤 국립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장은 “오산 이강 선생은 한 평생을 독립운동에 헌신하고, 임시의정원 의장을 역임했음에도 불구하고 국민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대표적인 독립운동가 중 한 명”이라고 강조하면서, “앞으로도 대한민국 임시정부 관련 숨은 독립운동가를 적극 발굴하여 국민들에게 알림으로써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정신과 가치를 함께 공유하고, 확산시켜 나갈 수 있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붙임 1. 설니홍조 수록 주요 글귀

2. 오산 이강의 생애

 

 

 

붙임1

설니홍조 수록 주요 글귀

1. (오산 이강이 쓴) 서언

 

나는 한국 혁명당의 일원으로 40여 년간 줄곧 해외에서 혁명 활동을 하였다. 호놀룰루에서 미국으로 미국에서 러시아로 가서 중국에 이르기까지 한편으로 신문을 창간하여 주의를 선전하고 한편으로 공포주의 운동을 실행하였다. 비록 실패가 많고 성공은적었지만 하얼빈의 총소리, 경성의 서슬퍼런 칼날, 남대문의 폭탄 등 영예롭고 혁혁한 전공들은 세인의 주목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왜구의 간담을 서늘케 하여 적의 혐오와 두려움을 불러일으켰다.

1937년 우리 스승 안창호 선생께서 다시 감옥에 수감된 후 결국 의로운 생을 마감하셨다. 그후 환경의 열악함에 무한한 비애를 느끼고 나는 이곳에 도착하여 휴양소로 삼았다. 세월이 덧없이 흘러 벌써 이곳에서 7년을 지내었다. 그간 비록 자력으로 생활하였다고는 하나 친왕산(秦望山), 좡청보(莊澄波), 예페이잉(葉非英), 정젠훈(鄭健魂) 여러 선생의 보살핌과 어르신들의 후의가 없었으면 어찌 집처럼 편안히 지낼 수 있었겠는가. 이에 그 사랑과 보살핌에 조금이나마 보답하고자 스스로 영문보습반을 운영하였다. 그간 수년 동안 공헌한 바가 심히 적으나 성심성의껏 노력을 다하였다.

 

세계대전이 장차 종결되고 주축국의 붕괴가 임박한 이때 우리 한민족 운명의 신은 나에게 서둘러 전쟁터로 가서 승리의 영광을 쟁취하라고 암시하고 있다. 따라서 숙연히 행장을 갖추고 제2의 고향을 떠나려 할 때 감정이 복받쳐 올라 이 기념책을 만들었다. 이로써 잊지 못할 충정을 표함과 동시에 그대의 서명을 간구하여 평생 잊지 않고자 한다.

 

1944년 8월 25일

이오산〔印〕

취안저우에서 씀

 

2. 치우예(秋葉)가 이강에게 쓴 글

 

"이별은 쉬워도 만나기는 어렵다"

상하이·홍콩·샤먼 혹은 칭다오·다롄에서 어르신의 자애로운 얼굴을 다시 뵙기를 바랍니다.

취안저우를 떠나시는 오산 어르신을 기념하며

질(侄) 치우예가 1944년 8월 21일 장저우에서

 

3, 리이(李毅)가 이강에게 쓴 글

 

굳은 의지와 고된 투쟁 속에 인생은 얼마나 위대한가.

오산 선생님, 당신을 깊이 존경합니다.

리이 삼가 씀〔印〕

1944년 8월 17일

 

4. 쉬징센(徐景賢)이 이강에게 쓴 글(가장 이른 시기에 쓰여진 글)

 

삼가 축원합니다.

한국 원훈, 오산선생의 평안을 기원합니다!

천도!인도! 일본제국강도와 싸워 이기자!

루자 쉬징센(徐景賢)

1935년 5월 15일

 

5. 백범 김구의 글

(중국 範浚(1102-1150)의 문집 『香溪集』수록)

 

 

아득한 우주는 굽어보고 우러러보아도 끝이 없는데, 사람이 그 사이에 있으니 아득히 멀고 넓은 가운데 몸이 있다. 이 몸의 작음을 비유하면 큰 창고에 쌓여 있는 쌀알과 같은데, 삼재에 참여하게 된 것은 오직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예로부터 지금까지 누가 이 마음이 없었겠는가, 마음이 형체에 부림을 당하니 결국 금수와 같아졌다. 이는 입과 귀와 눈, 손과 발의 모든 움직임에 틈이 생겨 그 마음의 병이 들었기 때문이다. 마음이 미약해지면 수많은 욕심이 공격하니, 그 마음을 온전히 보존하는 사람이 슬프게도 드물구나. 군자는 마음을 보전하기 위해 성심을 보존하고 생각을 이겨내고 능히 공경하니, 천군이 태연함은 온몸이 마음의 명을 따랐기 때문이다.

丁亥 겨울에 백범 김구가 心箴을 써서 李吾山 仁兄의 청에 응하다〔印〕

 

6. 성재 이시영의 글

 

오산 지형〔印〕

군자는 덕으로써 사람을 사랑하며

스스로를 기만하거나 남을 속이지 않는다.

八三 愚損

이시영〔印〕〔印〕

 

 

7. 오산 이강 자필 이력서

 

 

 

 

 

 

붙임2

오산 이강의 생애

 

오산 이강(1878 ~ 1964) 선생은 평안북도 용강 출신으로 미국 하와이로 건너간 뒤 독립운동에 참여하기 시작하였다. 샌프란시스코, 러시아 연해주, 만주와 중국 등지를 다니며, 《공립신보》 주필, 《대동공보》 편집책임을 맡는 등 항일 언론 활동을 하였으며, 안중근 의거를 계획과 실행을 돕기도 하였다.

1919년 강우규의 폭탄 투척 사건에 연루되어 옥고를 치른 후 중국 상하이로 건너가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여하였다.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의원과 부의장을 거쳐 1927년 임시의정원 의장을 역임하였다. 흥사단 원동지부원으로 참여한 후 남중국 방면을 여행하면서 1928년 중국인 교회에서 강연하다 체포되어 평양에서 다시 옥고를 치렀다.

1930년 9월 만기 출옥 후 고향 용강에 거주하다가 다시 중국으로 건너가 푸젠성 취안저우에 정착하여 7년 동안 거주하였다. 그동안 영문보습반을 운영하며 수년간 중국인 제자들을 양성하였다. 1941년 한국광복군 수립 후 광복군 제1지대 제2구대 징모 임무를 띠고 푸젠성 룽옌, 난핑, 지엔양 등지에서 광복군 모병활동을 하다가 광복을 맞이하였다.

광복 직후 중국 장시성 하구와 저장성 푸춘장 일대에서 활동하다가 1946년 타이완에 파견되어 한국 동포의 안전 귀환을 위한 임무를 수행하였고 1947년 귀국하였다. 1948년 흥사단 본부 심사부장, 1953년 남산고 교장을 역임하였다. 정부는 선생의 공적으로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출처] 대한민국 정책브리핑

 

 


반응형

댓글